연예인 난중일기가 실제로 도난당하고, 일본에 유출될 뻔했던 사건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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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12-17 14:35본문
때는 1968년 12월 31일.
연말연시를 맞이한 대한민국과
이순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던 현충사.

여느때와 다름없이 관리직원은 아침순찰을 도는데
어..?
닫혀있어야 할 전시실이 열려있네...?
어..?
잠금장치가 도려내져있어...?
어어...?
난중일기 어디갔어....???????????
전시실에 있어야할 임진일기 전권, 임진장초, 서간첩 등 10권이
통째로 사라져있던 것이다.
난리가 난 대한민국.
충격을 받은 건 국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군인 출신으로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해왔던
박정희 대통령 또한 충격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1월 1일부터 시작된 수사가 일주일째 진전이 없자
박정희 대통령은 1월 8일,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1월 17일까지 난중일기를 찾지 못하면 모든 수사 기관을 총동원하여 범일을 체포, 엄벌하겠으며
범인 스스로 뉘우쳐 자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면 그 죄에 대해 일체 불문에 붙이고,
난중일기 행방을 알려주는 시민에겐 상금을 주겠다."
일반 사건과 다르게 이례적으로 특별 담화까지 발표하며 난중일기 탈환에 열을 올린 것.
경찰은 용의자로 크게 두 명을 제시하였는데
1. 서울 거주 이재용 (당시 33세, 무직)
당시 덕수 이씨 충무공파 직계/ 방계간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 사건 발생 3일 전 온양에 왔으며 사건 전후로 현충사를 자주 드나들었고,
평소 종친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다가 12월 중순에 불쑥 나타나서
"난중일기 한 장만 떼어 팔아도 10만원" 이라는 소리를 한 적 있다고 함.
2. 이와오 기요시 (岩尾, 당시 27세)
사건 발생 얼마 전까지 온양을 자주 드나들었던 일본인.
이재용은 도박판에 자주 드나들고 문중 안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이와오 기요시 역시 사건 발생 이틀 전 오전 11시에 출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두 용의자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박정희의 특별 담화는 이 이후인 것으로 보임)
그렇게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던 도중
박정희의 특별 담화 이후
1월 9일 11시에 부산시경에 한 통의 제보가 접수되었다.
동래 온천장의 모 다방에서 국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봤다는 것.
제보자는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하는데
온청동 시장 근처에서 그들이 "이렇게 하면 잡히기 쉽다" 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확신을 했다고 하며
신고하기에 이른다.
경찰은 결국 신고를 토대로 첫번째 공범을 잡는데 성공, 차례로 여섯명을 검거하는데 성공한다.
공범은 총 7명이었는데, 그 중 한명은 금정산 금강공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부검결과 음독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동자는 류근필(당시 37세, 골동품상)은 이미 1년 전 통도사에서 동은사마법병을 훔쳐 재벌 이모씨에 팔아넘긴 혐의로 9개월 징역형을 살고 나온 적 있는 동종범죄 전과자였다.
류근필은 일본에 난중일기를 팔면 천만원을 받을 수 있다며 공범들을 꼬신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범행 1주일 전에 현충사 사전답사까지 한것으로 밝혀졌으며,
현충사 전시실에서 철문을 부수고 훔치는 데까지 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현장검증을 통해 밝혀졌다.
(나무위키피셜로 천만원이면 현재 돈으로 약 3억에 해당하며, 6명이서 나누면 한사람당 현재돈 5천 정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즉, 5천만원을 위해서 나라의 보물을 심지어 일본에 팔려고 했던 것.)
체포에 관련된 경찰들은 특진이 이루어졌고, 제보자들에게도 금일봉이 전달되었으며, 원래 1명 더 공범이 있었으나 현장답사 후 포기한 점을 미루어 특별 사면되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경찰의 초동수사 미흡과 용의자 선정 과정에서의 잡음으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첫번째 용의자 이재용에 대해서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방면했음에도 이틀 뒤 사기 및 도박 등의 혐의로 구속시키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재용 본인은 경찰의 육감수사의 피해자가 될뻔 하였다고 말했다.
또한, 이 사건의 도난품이었던 난중일기는 회수 후 확인해보니 서간첩 6장 세 통이 빠진 것이 확인되었다.
공범 중 한명이 범행 중 빼돌린 후 검거되었으며 그 후 그의 부인이 후환이 두려워 태워버리려 했으나 소각 직전에 모두 간신히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난중일기는 일반 대중에 공개되지 않게 되었고, 5백부가 복사되어 전국 공공도서관 및 박물관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사건의 더욱 자세한 내막은 위키백과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길)
출처)
난중일기 도난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충남도정신문격동의 충남 100년! 이순신 난중일기 일본 .. : 네이버블로그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쓴 글입니다.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하시면 언제든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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